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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용의 견공담론(犬公談論) ②
    최지용의 견공담론(犬公談論) ②크리스마스와 루돌프   애견인구 1천만 시대이다. 대한민국 인구 대비 4.8명에 1마리 꼴이라는 단순계산이 나온다. ‘가족’, ‘우리집 아이’라고까지 불리는 오늘날의 견공들, 과연 우리는 그들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인간과 가장 많은 교감을 하며 우리 곁을 지키고 있는 그들에 대해 제대로 한번 알아보자. 알고 함께하는 공존은 더욱 아름답다. 기존에 개에 대해 갖고 있던 섣부른 상식이나 지식은 잠시 내려놓고 ‘개 백과사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남자, 최지용의 솔직하고 재미있는 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글 최지용(베프월드 대표 031-932-4355)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원래는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 그러니까 종교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날이다. 그런데 불교, 이슬람 등 기타종교를 믿거나 아니면 무신론자까지도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등의 다른 기념일처럼 부담 없이 즐기는 전 세계인들의 축제일이 된지 오래다.이 크리스마스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거리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캐럴송으로 넘쳐날 것이고, 종교에 관련 없이 누구나 왠지 기분이 좋고, 눈이라도 펑펑 와주면 정말 축복을 받을 것 같은 날이 된다. 가난한 연인들이 거리를 방황하다 밤이 늦어 숙박업소를 찾게 되면 이상하게도 그날만 일반 객실은 없어지고 특실만 남는 불가사의를 경험하게 되는 날이고 상대적 외로움에 몸을 떠는 솔로들도 크리스마스 특집을 밤새 볼 수 있어 덜 외로운 날이다.   아기예수를 만나러 동방박사와 동행한 세 마리의 개아기예수가 예루살렘의 마구간에서 태어날 때 동방박사 세 명이 찾아간 것은 아마 다들 알고 있을 것이지만 그 동방박사 세 명이 개 세 마리와 함께 간 것을 알고 있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동방박사는 말 그대로 동쪽에 사는 현인이라는 뜻인데 그 당시 네비게이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밝게 빛나는 하늘의 별빛을 따라 가기가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개를 길잡이로 데리고 간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의 생각이고, 좌우지간 유럽에서 이어져 오는 전설에 따르면 동방박사 세명은 ‘루비노, 멜람포, 큐빌론’의 이름을 지닌 세 마리의 개들과 함께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개들의 이름의 끝이 O, N으로 끝나는 것을 보면 모두 수컷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암컷이라면 ‘루비나, 멜람파, 큐빌라’이었을 것이다.그러니까 남자 아기 예수를 만나러 가기 때문에 개들도 수컷이 따라 간 것이라는 말이 될 것이고, 동쪽에서 똑똑한 사람 세 명이, 수컷 개들을 데리고 갔다라는 것을 “해가 떠오르는 희망이 있는 곳에서 현인 세 명 - 그리스도교에서는 항상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삼위일체를 중요하게 해석한다. - 이 인간과 가장 친근한 존재, 세 마리와 함께 인류의 구세주를 맞이하러 왔다.”라고 풀이할 수도 있지 않나라고 해석하면 어떨까?어찌됐든 오늘날에 위 개들의 이름을 부여받은 개들은 축복받은 개란다. 메리나 쫑이나. 사랑받고 사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루돌프 코가 빨간 이유   또 크리스마스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아이들의 영원한 스타 산타클로스! 선물을 마구 주는 할아버지, 크리스마스 전부터 선물을 받길 원하는 아이들의 버릇을 고치는데 혈안이 된 부모들에게 무지막지하게 이용당하는 산타클로스가 있다. 이 산타 할아버지는 매번 사슴인지, 순록인지가 끄는 썰매를 타고 오시는데 썰매 끄는 애들 중 리더는 코가 빠알간 ‘루돌프’라는 놈이다. 다른 사슴들은 코가 새까만데 왜 유독 루돌프코만 빨간색일까? 전문가적인 견지에서 보면 ‘윈터 노우즈(Winter nose)’라고 단언 할 수 있다.보통의 경우 동물들의 확연하게 보이는 털의 색을 “색조”라고 하며, 그러한 색조를 만들어내는 원색을 “색소”라고 한다. 이렇게 몸에 숨어서 겉의 색을 결정짓는 색소의 정도와 유무를 아는 방법이 바로, 코, 눈동자, 입술, 항문, 발바닥의 패드 등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강아지 구입 시 건강상태 확인법과 더불어 좋은 유전자를 지녔는지를 보려면 까만 코, 까만 눈, 까만 입술 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까만 코를 지닌 개들도 겨울이 되어서 일조량이 부족하게 되면 코가 색소를 잃어버려 겨울동안 일시적으로 빨개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윈터 노즈"라고 한다.그러니까 산타 할아버지의 루돌프는 멜라닌 색소가 없어져서 코가 빨개진 것이지, 사슴이 무슨 전기뱀장어도 아니고, 코에서 빛이 나겠는가? 어쨌든 징글벨이 울리든, 울리지 않든 어김없이 크리스마스는 다가오고, 산타가 방문하는 가정의 부모님들은 주머니가 얇아질 것이고, 2013년은 또 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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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26
  • 주제로 읽는 책 읽기
    “순례”   우리에게 ‘순례’라는 말은 꽤 익숙하다. 경건한 신앙의 의미에서든 상업화한 여행상품으로서든 성지순례 관련한 내용을 자주 접하게 된다. 굳이 종교 성지와 연관되지 않더라도 뭔가 의미심장한 여정을 말할 때에 순례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네 인생의 과정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에 순례를 비유하기도 한다.이렇듯 순례라는 말이 일반화한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지만, 그래도 순례라는 말은 종교에서 연원한 의미가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순례에 관해 생각해보면서 순례의 종교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대표적인 내용 몇 가지만 정리해본다.   첫째, 순례의 종교적 의미는 ‘공간의 성화(聖化)’라는 개념과 연관된다. 이 내용에 관해서는 특히 현대의 대표적 종교학자 중 한 사람인 멀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가 잘 설명해주었다. 엘리아데는 인간의 종교경험이 지니는 핵심적 의미와 구조를 성현(聖顯, Hierophany) 개념으로 설명한다. 속(俗)의 차원에 속한 인간이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것은 성스러움 스스로가 속의 차원 안으로 모습을 나타내면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성현 현상이 일어남으로써 평면적이던 속의 차원에 질적인 변화가 생긴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시간과 공간과 연관하여 분명한 인간의 종교경험으로 이어진다. 성스러움을 체험한 시간과 공간은 주변의 속과는 다른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으로 질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른바 성지(聖地)는 이렇게 성화된 공간의 대표적인 예이다. 가장 근원적인 성현 현상이 일어난 공간이 성지로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둘째, 순례에서 추구하는 것은 ‘근원적 의미로 회귀(回歸)’이다. 종교적 인간이 성지를 순례하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성스러운 공간에 깃들여 있는 근원적 성현의 의미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종교적 인간은 원초적 성현 체험 이후 속의 삶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성현 체험을 반복하려는 열망을 지닌다. 원초적 성현 체험 안에서 인간과 우주의 가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복적인 성현 체험은 종교의례와 기도 등의 일상적 종교 실천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특별히 성지 순례는 근원적 성스러움의 공간을 직접 찾아가는 행위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셋째, 순례는 ‘신앙’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낸다. ‘신앙’의 의미에 관해서는 또 한 사람의 저명한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1916~2000)가 잘 설명해주었다. 스미스는 신앙의 의미를 ‘초월적 존재 혹은 진리를 향한 전인격적 응답[헌신]’으로 설명한다. 마치 깜깜한 밤바다에서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던 배가 마땅히 도달해야 할 항구의 등대 빛을 확인하고 그 이후로는 오로지 등대를 향해 배의 방향을 설정해놓은 상태와 같다. 여기에서 신앙의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방향 전환’이다. 등대 빛을 발견하기 이전까지 엉뚱한 방향으로 놓여 있던 배의 방향타를 진정한 등대를 향한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앙은 삶의 전환을 의미한다. 초월적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 전혀 다른 존재로 뒤바뀜을 의미한다. 신앙의 다른 하나 요소는 ‘끊임없는 진행’이다. 등대 빛을 발견하고 등대를 향해 방향을 전환했다 해도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서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실제로 등대에 가까이 도달하기 위한 끊임없는 항해를 진행해야 한다. 초월적 진리를 발견했다 해도 그것을 그저 머리로 알고 말로만 되뇌는데 그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의 의미일 수 없다. 신앙은 실제로 나 자신의 삶과 존재 자체가 끊임없이 초월적 진리에 가까워지려는 진행형의 의미를 지닌다. 성스러운 의미가 깃들여 있는 성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순례는 초월적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추구라는 신앙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준다.   이상에서 정리한 순례의 종교적 의미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던 개인적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려한다. 십여 년 전 미국의 어느 대학에 방문 연구원 자격으로 머물던 때의 일이다. 그곳 연구소에서 인도에서 온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는 무슬림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슬람에서는 일 년에 한번 대대적인 성지순례 행사가 이루어진다. 이슬람력으로 12월에 전 세계의 무슬림들이 성지 메카로 순례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내가 만난 그 인도 친구도 마침 그 해의 순례 행사에 참여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런데 새삼 나를 감동시켰던 것은 그가 순례 여행을 떠나기 위해 일 년 동안 조금씩 돈을 모으고 있다는 말이었다. 사실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그렇게 돈을 조금씩 모아야했을 수도 있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순례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순례의 종교적 의미가 일차적으로는 성스러운 공간에 깃들여 있는 근원적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순례의 의미를 충실히 실현하는 것은 단순히 목적지에 도달함 자체보다는 그곳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초월적 진리에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려는 신앙의 의미가 순례의 과정 전체에서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내가 만난 인도 친구가 일 년 동안 한푼 두푼 돈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이미 그는 순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셈이다. 요즘 일부 성지순례 여행이 그저 장소에만 초점을 맞춘 관광 여행과 다를 바 없어진 것에 비추어 생각해볼 문제이다.   순례의 종교적 의미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 다음 두 권을 추천한다.『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의 순례』, 김승혜, 바오로딸, 2004년『신을 찾아 인간을 찾아 : 세계 종교문화 기행』, 정진홍, 집문당,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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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26
  • 쉽게 이해하는 또 하나의 세계, 이슬람 ⑪
    쉽게 이해하는 또 하나의 세계, 이슬람 ⑪인도의 무갈제국   글 정상호(경제학박사)   지난 에피소드에서는 역사적 서술을 잠시 벗어나 이슬람 철학과 수피전통에 대해 언급했다. 이번 호부터는 중세 후기로 접어들던 14세기 전후에, 발칸반도에서 중앙아시아 옥서스강(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등지에 걸쳐 흐르는 아무다르야)까지 그리고 모로코에서 인도 및 방글라데시에까지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3~4세기 동안(오토만제국의 경우는 20세기 초까지 6세기 동안) 거느렸던 3개 이슬람 제국에 대해 설명하기로 한다. 화약의 제국터키를 중심으로 한 오토만 제국(1299-1923), 오늘날의 이란에 세워졌던 사파비드 제국(1501-1736), 인도 및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거의 통치했던 무갈제국(1526-1857)은 보통 싸잡아서 ‘화약의 제국’이라고 불려왔다. 그 이유는 이들 3개 제국이 포병대를 전투전략의 핵심으로 삼은 최초의 왕조체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포병대 활용이 이들이 최초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화약의 제국이란 표현은 ‘화약의 시대’에 세워진 제국‘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한다.이들 세 제국의 공통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들 세 제국은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지배층들은 모두 투르크-페르샤계 민족이었고 원래 해당지역에 거주하던 토착민족을 외래 민족들이 들어와 지배하는 형태를 띠었다. 이들은 모두 농업 중심국이었으나 사파비드는 국고 수입을 실크 판매에 거의 의존했고 오토만과 무갈은 건조지대에서 출발하여 농토가 비옥한 지역을 차츰 정복하여 나중에는 농업 및 수공업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또 이들은 모두 강대국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충분히 내재하고 있었으나 근대화의 기회를 놓치고 결국은 18세기 이후 유럽 열강들의 침탈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각 제국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더 자세히 언급이 되겠지만 지도자들이 근대화 개혁을 단순히 군사력을 강화하는 정도로만 이해하여 유럽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하고 군사조직을 개편하는데 머물렀을 뿐, 보다 근본적인 정치·사회 개혁에는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무갈제국의 탄생과 전성기‘무갈’이란 아랍어로 몽골이라는 뜻으로 이는 무갈제국이 티무르의 후손이 세운 왕조이기 때문이다. 티무르는 정확히 말하면 투르크계 지배자였지만 자신의 통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징기스칸의 후예임을 내세웠기 때문에 그 후손이 건립한 왕조에 무갈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또 무갈왕조는 1526년 중앙 아시아 출신 바부르(1526-30)에 의해 창건되긴 했지만 실제로는 3대왕인 아크바르(1565-1605) 재위 시절에 국가가 정비되고 제국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게 된다.바부르의 아들 후마윤(1530-39; 1555-56)은 아프가니스탄의 패쉬툰 왕조에 패해 영토를 거의 빼앗기다시피 했으나 이후 실지(失地)를 회복하고 자신의 왕권도 되찾을 수 있었다. 아크바르와 함께 5대 샤자한(1628-58) 재위 시기는 무갈제국의 전성기로 영토가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고 통치 인구도 1억 5천(당시 세계 인구의 1/4)에 달했다. 샤자한 시기에 가장 잘 알려진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타지마할’로서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쉬주(州) 아그라에 위치한 이 영묘(靈廟)는 지금도 세계에서 손꼽히게 아름다운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아크바르는 40년에 걸친 통치 기간 동안에 비무슬림 피지배층에 대해 매우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술흐이쿨’(peace to all)이라는 일종의 수피철학에 근거한 정책을 채택하여 힌두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포르투갈에서 건너온 제수이트교 등에 대해 공정한 태도를 견지했고 이와 관련하여 아크바르는 비무슬림들에게 부과하는 지즈야세금까지도 철폐하는 혁신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는 심지어 말년에 가서 이슬람과 힌두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까지 포괄하는 ‘딘이일라히’(religion of God)라는 이름의 포용적, 절충적 종교까지 창시했고 임종 직전에는 자신의 창시한 종교로 개종을 하려다가 궁중시종들의 만류로 결국 무슬림으로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얘기까지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샤자한의 아들인 6대 왕 오랑제브(1658-1707)는 이전 왕들의 종교적 관용정책을 과거로 되돌려 엄격한 수니 이슬람 원리에 근거한 정책을 강행했다. 그는 수많은 힌두사당을 파괴하고 음악연주까지 금지시켰는데 그래서 18세기 이후 무갈제국의 쇠퇴가 오랑제브의 종교정책과 이에 대한 힌두교도들의 저항 고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무갈제국의 멸망과 그 유산 1707년 오랑제브 사망 이후 무갈제국은 후계자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다투는 혼돈 상태에 빠졌다. 무하마드샤(1719-1748)를 제외한 14명에 달하는 무갈왕들은 그 후 재위 기간을 10년도 못 채우고 폐위되거나 사망했다. 그래서 결국 18세기를 통틀어 무갈제국은 페르샤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침략을 받고 인도 남부의 데칸평야까지도 힌두왕조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18세기 중반 이후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인도에 진출한 영국이 인도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고, 1857년 세포이 반란 이후 무갈왕조는 공식 폐지, 영국 정부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무갈제국이 멸망한 지 150년이 지났지만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과거 무갈제국 치하에서 단일 문명권이던 방글라데시(동파키스탄), 인도, 파키스탄(서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이 제각기 찢겨 나가고 그들 중 일부 나라들은 서로 적대시 하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영국 식민당국이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를  끊임없이 이간시켰고 1947년 인도 독립 당시에도 힌두교-이슬람 인구 밀집 지역을 기준으로 자의적인 국경선을 그음으로써 독립 직후 무지막지한 학살을 초래하여 양자 간에 10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게 했기 때문이다. 이밖에 아프가니스탄이 별도의 민족국가로 떨어져나간 근원은 18세기 중반 이후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은밀하게 벌어졌던 ‘그레이트 게임’ (Great Game)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이 두 열강의 합의 하에 아프가니스탄은 완충구역으로 지정되었는데 지금도 아프가니스탄 동부는 파키스탄 서부와 구분하기 힘들고, 패쉬툰족 주민들은 국경 구분이 무의미할 만큼 양쪽을 제 집 드나들 듯이 오가고 있다. 그리고 헤랏을 중심으로 한 아프가니스탄 서부 지역은  이란과 거의 같은 문화권에 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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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26
  • 눈 내리는 밤에...
    한글꽃 피다 <눈 내리는 밤에...  >   고요한 밤거룩한 밤어둠에 묻힌 밤반짝이는 추리에 눈은 내리고   천지만물이 고요히 잠든 시간생성과 소멸의 끊임없는 움직임에음양오행의 윤회로 우주를 만들고 키워내는 시간   요란하지 않은 작은 움직임에도 소리없이 뜨거운 숨결을 토해 내고 기침소리 요란한 적막이 흐르는 하얀 밤이다.   자연의 숨결을 느끼며 산다는 것얼마나 아름답고 고운 삶인가.   아주 작은 떨림까지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가슴으로 서두르지 않고 느릿느릿 살아가는 달팽이처럼멋을 알고 맛을 느끼며 천천히 여유롭게 가는 삶이여야 한다.   【物我一體(물아일체)】의 삶이다. 자연(物)과 내(我)가 하나(一體)가 되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행복한 삶인 것이다. 사람은 자연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기 때문에 늘 자연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자연은 모든 걸 내어 주는데도 늘 그렇게 있어 귀한을 모르고 감사함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사람이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생명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항상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2013년을 보내며 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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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19
  • 해 뜨는 순간에
    2014 신년축시   어둑한 길을 물어 새벽은 도착했다촘촘히 추운 집들 몇 년을 버텼느냐다 삭아 흙밥 되어도그리운 화석 한 점   살아 낸 그 역사는 고향이 되어 주고,살아 갈 고향 언덕 역사를 남겨준다떠돌던 별자리마다새 이름이 생겼다   물 위로 솟는 해도 땅 위로 솟는 해도해가 뜨는 순간의 기적을 보는 일은참으로 생각 할수록대단한 일 아니더냐!   세종이 처음 만든 조선의 달력으로온 누리 춘하추동 눈 비 바람 거느려라갑오년대왕이 타신푸른 말이 다시 오면,   님의 거처 행궁 있는 남한산성에 올라왕조가 번성했던 기억을 알고 있는숭렬전옛 길 물으며해맞이 하러 가자.   창창한 미래 앞에 해 돋는 성남, 판교아름다운 성남 예찬! 꿈의 도시 상징으로우리도 고삐를 당겨푸른 말을 타고 가자 한춘섭(시조시인, 성남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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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16
  • 블루스… 그리고 대한민국(2)
    유무동의 Blues Time - 블루스 이야기 ⑧블루스… 그리고 대한민국(2)   글 유무동 Blues Festival For Peace In Korea 사무국장 / 음악평론가   한국전에 참여했던 블루스 뮤지션지난 호에서 한국전쟁과 관련된 블루스 곡들이 어떻게 탄생됐는지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블루스 뮤지션들에 대해 알아보자.   1. John Mayall  영국육군 소속으로 참전, 1951년부터 1954년까지 병참지원 후방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너무나 유명한 British Blues의 대가로 한국전에 참전하며 기타를 처음 만져봤다고 한다. 훗날 한국전을 기억하며 Back From Korea라는 노래를 작곡하고 Rose Brown & Jimmie Harris가 녹음하였다. 2. J.B. Hutto  블루스레이블 Delmark 소속으로 시카고 블루스를 대표하는 기타리스트로서 큰 족적을 남긴 뮤지션이다. 장기는 슬라이드 바를 이용한 셔플리듬을 환상적으로 연주하였다. 미국육군 수송병으로 참전하였다. 3. Johnny “Big Moose” Walker  필자가 아주 좋아하는 피아노 블루스, 부기우기 뮤지션중 한명. 육군 소속의 연예사병으로, 서울의 미군 영내클럽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고, 블루스레이블 Bluesway 소속으로 피아노 블루스 연주자이다. 4. Nat Foster  미 육군 540 수송대 소속으로 춘천지구 전투에 참전. 블루스레이블 MGM 소속의 피아노와 베이스 연주자이자, 소울블루스와 리듬 앤 블루스계열의 뮤지션이다. 5. William “Soldier Boy” Huston  연예사병으로서 1941년부터 미군 소속으로 노래를 했으며, 정확한 참전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만든 몇 곡의 한국과 관련된 곡이 있다고 하나 발매되지 않았고, 안타깝게도 한국전에서 전사했다. 6. Alford “Chicago Pete” Harrell  1950년에 참전한 Chicago Pete로 알려져 있고, 올해 한국나이로 84세인데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시카고 블루스 뮤지션이다. 7. Sammy Lawhorn  시카고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 미 해군 소속의 항공 촬영병으로 1953년 참전했는데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의가사 제대하였다고 전해진다. 8. Little Joe Blue  역시 필자가 아주 좋아하는 블루스 뮤지션으로 한국전에는 1953년에 참전했고, 종전 후 1956년까지 국내에 머물렀으며, 텍사스 블루스의 대표주자 중 한명의 기타리스트인데 노래도 기타연주만큼이나 아주 수려하다. 9. Velba Lee “Little” Applewhite  1.4후퇴를 즈음하여 참전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와 관련된 아주 자세한 정보는 없고, 다만 멤피스 블루스 맨으로서 주로 세션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10. J.D. Nicholson  1950년에 참전한 블루스 피아노 연주자로서 솔로앨범은 발표한 적이 없고 주로 유명 블루스 뮤지션들의 앨범에 세션으로 참여했다. 11. Rudy Ray Moore  이 뮤지션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었고, 다만 연예사병으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참전했으며 연주자로 알려져 있고 정확히 어떤 악기를 연주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2. Iverson “Louisiana Red” Minter  너무도 유명한 블루스 뮤지션 중 한명이다. 이런 뮤지션이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미 공군소속으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참전했으며, 일반 사병으로 복무. Louisiana Red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고 Louisiana Blues의 대가이다.   이상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뮤지션을 간략하게 소개해보았고, 다음호에는 한국전을 노래한 블루스 곡을 소개한다.   Blues Festival For Peace In Korea 참여예정 블루스뮤지션이 추천하는 블루스명반 밴드명  Gugun Power Trio 국적  Indonesia             연주스타일  Texas Blues, Blues-Rock         대표앨범 2005 - get the bug2006 - live at bintang bali2007 - turn it on2010 - gugun blues shelter2011 - solid ground   Websitehttp://blues-shelter.comhttps://www.facebook.com/pages/Gugun-Power-Triohttp://www.sputnikmusic.com/bands/Gugun-Power-Trio   Stevie Ray Vaughan & Double Trouble - Couldn't Stand The WeatherLike Jimi Hendrix, Vaughan worked magic with his guitar and turned audiences up high everywhere he went. He never forgot his blues roots, and this concert has the kind of variety that brings generations together. From Delta-flavored moans to hard Texas swing and powerful, rock-inspired anthems he covered a lot of territory. “Voodoo Chile” represents Hendrix, “Love Struck Baby” represents a swinging Texas affair, “Honey Bee” feels as if it came right out of Chicago, and “Tin Pan Alley,” also known as “Roughest Place in Town,” has roots along the Mississippi River, where the blues began. (설명이 필요 없는 작고한 텍사스 블루스 대가의 대표명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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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16
  • 나이는 앞으로 기억은 뒤로
    나이는 앞으로 기억은 뒤로   글 김다나 [동요작사가 / 글 짓는 이]     귀 밑 1cm로 자른 검은 색 단발머리에 검정 플레어스커트, 빳빳하게 풀 먹인 하얀 칼라를 단 검정 상의, 허리를 꽉 졸라맨 버클 벨트. 이만하면 제 여고시절이 어느 때쯤이었는지 얼추 짐작이 가시죠?   풀 먹여 빳빳한 하얀 칼라 교복 학교 다녀와선 칼라 빨아 풀 먹여 다리는 일로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지금처럼 편리한 다림 풀이 시중에 나와 있지 않았던 시절이라, 그게 제법 큰일이었지요. 풀이 너무 세게 먹은 날엔 뒷목이 발개지고, 약하게 먹힌 날엔 여차하면 교문 앞에서 규율부에 걸리기도 했거든요.  그러던 중에 제가 다니던 여고가 머리형 자율화 시범학교로 선정되는 바람에 다른 여학교 학생들보다 몇 년 앞서 단발머리를 면하게 되었지요. 오늘은 그 얘기를 풀어보렵니다.   새 학년이 시작된 날, 강당에 나란히 서 있던 우리에게 내려진 교장선생님의 훈시. ‘이러 저러 해서 우리 학교가 시범학교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요란 떨지 말라.’ 당연히 강당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학생주임선생님을 비롯하여 모든 선생님들께서 회초리를 두드리며 우리를 진정시키려 하셨지만, 말 그대로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일이었지요. 교실로 돌아와선 손으로 책상 치고 발 구르며 야단법석!   머리를 자르다? 머리카락을 자르다!그렇게 새 학년의 첫날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뭐였을까요? 교복 벗어던지고 미장원을 향해 빛의 속도로~~~^^당시 유행하던 혜은이 헤어스타일로 잘라 달라 말하는데, 동네 미장원 아줌마, 기겁을 하시며 ‘너, 미쳤니? 학생이 어떻게 그런 머리를 해?’ 하십니다. 당연한 말씀이지요. 키득대며 사연을 설명했지만, 여엉 못 믿는 눈치였지요. 해서 어떡합니까? 집에 전화해서 엄마와 통화하는데, 울 엄니, 내가 미장원 간다니까 단순히 단발머리 길이만 자르러 간줄 아셨지, 머리형 바꿀 줄은 모르셨지요. 아이쿠, 엄마한테 제대로 설명 안 한 ‘내 탓이요, 내 탓이요.’를 외치며 전화에 대고 엄마께 통 사정을 하는데, 바늘 하나 들어갈 기미가 없더라고요. 해서 어쩝니까? 다시 돌아와 엄마께 자세히 설명했더니, 아, 이 양반, 절대 안 된답니다. 졸업할 때까지는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시겠다니, 이 일을 어쩝니까요? 별 수 있습니까? 슬쩍 다시 나와 좀 젊은 미용사가 있는 다른 미용실로 갔지요.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머리를 맡겼더니, 두 말 없이 잘라주는 거예요. 물론 그 얼굴에 혜은이 헤어스타일 한다 해서 호박이 수박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달라진 모습으로 집에 들어간 후 어찌 되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우리가 자른 건 머리카락만이 아니었을 수도….다음 날 아침, 학교에서 벌어진 일은 더했지요. 평소보다 일찍 등교해서 규율부 시선을 피하고 교실에 들어갔는데, 아,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초록은 동색이라고, 머리형 바꾼 친구들이 죄다 일찍 와서 자리에 앉아 있는 거예요. 신나는 마음에 머리형은 바꿨지만, 다들 새가슴이라 콩닥거리는 맘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었던 거지요. 수업 시간 전에 우리를 본다고 다른 반에서까지 원정 와 구경을 하고…. 제 기억으론 우리 반에 일곱 명의 머리 자른 문제아(?)들이 있었습니다. 머리 자율화한다는 훈시를 들은 게 어젠데, 바로 오늘 아침 이렇게 변한 모습으로 왔다는 게 커다란 이슈가 되었고, 당장 문제아로 낙인 찍혀 버린 거지요. 그래도 저는  양반(?) 축에 속한 게, 파마에 염색까지 한 친구도 있었다는…. 당장에 우리 반은 문제아가 한 둘도 아닌 일곱이나 모여 있다는 이유 하나로, 모두가 도매금에 넘어가 그냥 문제반이 되어 버렸답니다. 우리 담임선생님, 얼마나 걱정을 하시는지, 지금 생각해도 송구스럽습니다. 그로부터 차례차례 상담실로 불려가는 신세가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지요. 하지만 우리의 기세에 힘을 얻은 많은 친구들이 커트 머리로 등교하는 바람에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당시 우린 그랬습니다. ‘아니, 머리 맘대로 하라 할 땐 언제고 이렇게 문제아 취급을 하나?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나?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인데…. 하이고 억울해라.’   당시 우리 반엔 졸업 후, 방송인이나 연예인이 된 친구들이 여럿 있었답니다.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탤런트 최모 양을 비롯하여 전직 아나운서 이모 양, 80년대 초 가수로 활동했던 함모 양, 영화배우 원모 양 등…. 그러고 보니 잠재된 끼가 넘치긴 넘치는 반이었네요. 그런데 사실 그때 우리가 잘랐던 것은, 그리고 자르고 싶었던 것은 머리카락만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잘라내고 싶었던 그 무엇인가가 있었지요. 하나씩 혹은 둘 셋씩….   이십여 년 전, 모 광고대행사를 통해 세제광고를 하는 데 살짝 관여한 적이 있습니다. 주부가 빨래하면서 지난 학창시절, 하얀 칼라를 빨던 때를 생각하며 이 세제를 사용하면 그만큼 하얗게 된다는 풍으로 가면 어떨까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 주르륵…. 이젠 시간이 많이 지나 얼추 할머니에 가까운 나이들이 되었으니 그런 내용의 광고가 먹혀들 리는 없겠지요?   이상한 것이, 나이는 하나씩만 앞으로 나아가는데, 기억은 두 개씩 뒷걸음질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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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16
  • 정의(正義)와 ‘위대한 패배’
    정의(正義)와 ‘위대한 패배’     “정의는 승리한다.”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말이다. 거의 세뇌 당하듯 주입받은 느낌이다. 세뇌 당했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정의는 승리한다.’고 믿는다. 정의가 승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현실 삶의 상황들이 끊임없이 나를 회의에 빠지게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놓칠 수 없고 또 놓치고 싶지 않은 최후의 보루이다. 이 신념이 무너지는 것은 나에게는 이 세상을 지탱할 정당성이 사라지는 것이다.물론 정의의 승리를 반드시 현세적 삶 안에서, 현세적 기준에서 규정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정의에 대한 나의 신념은 종교적 신념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사후 세계에서의 보상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정의를 초월적 진리의 범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정의는 초월적 진리처럼 현세적 가치와 질서를 넘어서는 것, 현세적 시간과 공간의 유한한 변화를 넘어서 그 의미가 유지되는 것이라는 뜻이다.초월적 진리는 온전히 그에 따르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 자체로 가치와 의미를 존중받는다. 비록 현세적 방식과 기준에서 어긋나는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드러나도 초월적 진리에 따르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결코 그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다. 초월적 진리가 아닌 현세적 가치를 따르는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바보’ 혹은 ‘패배자’라는 평가를 받을지라도, 초월적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변함없이 당당하고 의연하다. 초월적 진리는 현세적 가치를 넘어서는 무한하고 궁극적인 진리임을 믿기 때문이다.정의 역시 초월적 진리처럼 언제나 마땅히 그러해야만 하는 절대적 당위성을 지닌다. 사실 정의가 무엇인지에 관한 논의는 오래 전부터 심각하게 이루어졌다. 동서양의 고대 철학에서부터 현대 정치철학에 이르기까지 정의에 관한 다양한 의미가 논의되었다. 이 모든 논의를 고려한다면 ‘정의란 이런 것이다.’라고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정의가 확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절대 기준일 수 있을지 회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의는 초월적 진리와 같은 절대적 당위성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는 판단이 정의에 관한 나의 생각의 출발점이다. 이런 나의 생각이 명확히 정의는 이런 것이라고 의미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정의가 절대적 당위성을 지니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때의 모순과 문제를 더 심각하게 우려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분명 일시적 시대 상황이나 주도권을 지닌 누군가에 의해 이렇게 저렇게 변형될 수 없는 절대 불변의 진리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이런 맥락에서 정의의 의미를 색다른 측면에서 성찰해볼 수 있는 책들이 있다.   『위대한 패배자』,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을유문화사, 2005년, 399쪽『조선의 위대한 패배자들』, 임채영 지음, 경덕출판사, 2008년, 263쪽   사실 이 책들의 저작 의도는 현대 사회의 승자 독식주의 혹은 승자 만능 풍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승리를 꿈꾸며 치열한 경쟁에 뛰어 들고...이런 분위기 속에서 각광을 받는 것은 늘 승리자이고…. 패자는 비록 능력이 승자에 뒤지지 않더라도 항상 뒷전이고…. 승리자가 야비한 술수를 써서 승리를 따냈더라도 그에 대한 비난은 일시적이거나 ‘결국 마지막에 이긴 놈이 최고’라는 식의 결과론적 논리에 묻혀 버리고…. 과정보다 결과가 중시되고, ‘승자는 좋은 사람, 패자는 나쁜 사람’의 전형적인 틀이 만들어진다.”이 책들은 승자 위주의 풍조에서 한동안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났던 패배자들에 주목한다. 골리앗, 롬멜, 체 게바라, 앨 고어, 정도전, 조광조, 광해군, 김종서, 사육신…. 그동안 우리에게 이들 이름보다, 이들을 물리치고 승리자가 된 상대방의 이름들이 더 주목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역사의 주역 자리도 물론 승리자의 몫이었다. 이 책들은 이들 패배자가 지니고 있는 의미와 진면목을 회복시키고자 한다.그렇다면 이들이 비참한 낙오자에서 ‘위대한 패배자’로 재조명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정신과 실천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확고한 소신과 사상으로 무장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때로는 죽음까지 불사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이나 신념을 현실 세계에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비록 그들이 그 때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나 주도권을 거머쥔 사람들에 의해서는 패배자로 내몰려야 했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의 기준에서는 그들의 정당성을 인정해준 것이다. 초월적 진리 혹은 정의에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하는 그들의 신념이 결국 승리한 것이다.나는 이들의 삶을 통해 ‘정의는 승리한다.’는 신념을 다시 다잡을 수 있다. ‘위대한 패배자들’은 그들이 정의는 승리한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그에 따르는 삶을 산 사람들이다. 이들이 비록 그 때 당시 쓰라린 패배자로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결국 오늘날 위대한 패배자로 그 가치와 의미를 존중받는다는 사실이 정의는 승리한다는 진리를 분명히 입증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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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16
  • 피아졸라 최대의 걸작 ‘리베르땅고(Libertango)’
    피아졸라 최대의 걸작 ‘리베르땅고(Libertango)’ 글 김정식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한 번만 들어도 인상에 남는 독특한 멜로디리베르땅고라는 곡명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요요마(Yo-Yo Ma)의 멋진 첼로 선율로 시작 되는 리베르땅고를 들으면 ‘아! 이 곡!’하며 반가움을 떠올릴 것이다. 한 때는 거의 같은 시점에 서너 개의 CF에서 BG음악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만큼 유려하게 전개되는 멜로디와 단순하게 반복되는 반주는 마치 2개의 음악이 동시에 연주되고 있는 절묘함과 긴장감을 느끼게 해준다.아스톨 피아졸라(Astor Piazzolla 1921~1992)는 클래식 탱고에서 이른바 ‘New Tango’ 시대를 열은 탱고의 거장이다. 발을 위한 탱고가 아니라 귀를 위한 탱고의 시대를 열은 것이다. 피아졸라는 1974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 탱고계의 보수적이고 진부한 분위기에서 심기일전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가 현지의 음악인들과 함께 LP음반을 발표했는데 그 타이틀이 바로 리베르땅고다. 리베르땅고는 ‘자유’와 ‘땅고’의 합성어로 부에노스 아이레스 탱고계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한 분위기와 다이나믹한 리듬감이 일품이다. 피아졸라는 이 리베르땅고를 통해 형식에 얽매인 클래식 탱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탱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리베르땅고에 가사가 붙어 재탄생하기도리베르땅고는 당연히 땅고 기악곡이다. 그런데 이 곡이 발표된 이후 그 영향력은 재즈나 팝 심지어는 클래식 음악계까지 미쳤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레이스 존스(Grace Jones 1948~ )라는 여가수의 노래로 리베르땅고가 재탄생 된 것이다. 그 곡명은 I've seen that face before.그레이스 존스의 음악은 래게 스타일을 가미한 댄스뮤직인데 이 곡에선 미스터리한 가사에 유니크한 리듬이 붙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국내 어느 TV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테마 뮤직으로 쓰이며 더욱 많이 알려졌다.   이상해, 이전에 본 것 같은 얼굴인데,내 문 앞을 서성이는 그를 본 것 같아,먹이를 훔치려는 매처럼,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밤처럼,   이상해, 그는 나를 집까지 미행하고 있어, 발자국 소리는 자갈길에 울려 퍼지고,비 오는 밤, 하우스만의 번잡한 대로,바에서 흘러나오는 파리지앵의 음악.   바와 레스토랑에서의 댄스, 원하는 누구와도 집에 가기도, 이상한 그는 거기 혼자 서서,응시하는 눈초리는 나를 정말 소름 돋게 해.   덧붙이는 사족 같은 이야기Piazzolla의 현지 발음은 ‘피아졸라’가 아니라 ‘피아솔라’다. 언제부터인가 매스컴에서부터 ‘피아졸라’로 불리우기 시작하더니 이젠 굳어져버려 나도 그 호칭을 따르고 있다. Libertango는 ‘리베르탱고’가 아니라 ‘리베르땅고’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Tango를 하나의 단어로 볼 때 영어식으로 ‘탱고’라고 불리는 것이 현실이기는 하나 스페인어로는 ‘땅고’가 바른 표현이다. Libertango는 스페인어의 두 단어가 합쳐진 것이니까 ‘리베르땅고’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제부터 ‘리베르땅고’를 들어보자.   피아졸라가 죽은 후 추모음반이 수백 종이 나와 있으며 대개 그 음반마다 리베르땅고는 실려 있는 편이지만 오리지널 버전은 빼놓지 말고 들어보는 것이 좋다. 또 가능하다면 클래식 탱고와 비교 감상하면서 피아졸라가 리베르땅고에서 탱고는 이렇게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이 어떤 것인지 느껴보는 것도 좋으리라.   자메이카 태생의 그레이스 존스는 파리와 뉴욕에서 전문 모델로 활동 했으며 1981년에 발표한 I've seen that face before의 히트로 세계적으로 각광 받았다. 179cm의 큰 키에 강렬한 남성적 이미지의 카리스마를 지녔으며 007영화 뷰 투어 킬에서 본드 걸로 출연하기도 했다.   피아졸라는 한 때 클래식 탱고의 광팬들로부터 탱고를 버려놓는 사람이라고 살해 위협까지 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의 많은 작품들을 통해 ‘tango nuevo'의 시대를 완성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페라, 협주곡 등 클래식 작품도 다수 남겨놓고 있는데 또한 많은 클래식 연주자들이 탱고를 연주하도록 큰 영향력을 미치기도 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지휘자 정명훈이 산타 체칠리아악단과 연주한 리베르땅고도 참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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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13
  • 알 안달루스의 역사적 의의
    쉽게 이해하는 또 하나의 세계, 이슬람 ⑧알 안달루스의 역사적 의의   지난 번에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모로코까지 휩쓸어버린 뒤 이번에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까지 차지하고 그로부터 50여년 만에 압둘라흐만이라는 구 우마야드 왕자가 알 안달루스 에미레이트를 세우는 역사까지 알아봤다. 오늘은 그렇게 세워진 알 안달루스가 이후 유럽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망한 지 500년도 넘는 지금에 와서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자.   한 편의 서사시에 의해 싹트기 시작한 유럽 정체성샤를마뉴는 778년 군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자라고사(피레네 산맥 남쪽 스페인 영토 내의 도시)를 공격했으나 성 함락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대신 부근 지역을 약탈하여 전리품을 수레에 가득 싣고 론세발레스 고개를 넘어 프랑스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대열 후방에서 전리품 수송을 책임지던 샤를마뉴 휘하의 장수 롤랑드는 배후에서 공격해오는 바스크 주민들을 맞아 싸우다 전투 끝에 장렬히 전사하게 된다.이 일이 있은 후 200년이 넘은 후에 프랑스의 한 음유시인이 “Shanson de Roland”(Song of Roland)라는 장편서사시를 지었는데 이것이 유럽 전역에 걸쳐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된다. 실제 역사상으로는 바스크 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한 롤랑드를 이 서사시에서는 알 안달루스를 통치하던 “사라센” 왕 마실레의 기습공격에 의해 죽는 것으로 바꿔치기 한다.   무려 4천 줄에 달하는 이 장편 시에 따르면 자신이 아끼던 장수를 잃은 샤를마뉴 대제는 마실레에 대해 보복을 가하고 결국 마실레를 도우러 온 바빌론의 에미르벨리간트(아마 아바시드 제국의 칼리프를 말하는 것 같다.)까지 무찌르는 대성과를 거두게 된다. 마실레의 아내 브라미몬드는 자라고사 성의 문을 열어젖히고 프랑크군 앞에 항복을 하는 것에 더해서 나중에는 기독교로 개종하기에 이른다.   스토리 자체는 황당무계한 면이 없지 않지만 무슬림 스페인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유럽인들이 그전까지 전혀 갖지 않았던 유럽 정체성(Europenses)을 갖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선 이 서사시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어느 민족이든 서로 간에 차이를 극복하고 동질감을 갖게 하기 위해선 실제로든 가상이든 공동의 적을 만들어내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고 하겠다.   압달라흐만이 통치하던 8세기 중반 이후 코르도바는 당시 바그다드와 당나라의 창안(長安)과 맞먹는 세계 최고의 문화중심이었다. 이곳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해서를 집필하여 이름을 날린 철학자 겸 신학자 이븐 루시드(Averroes; 1126-98) 외에도 코르도바의 집현전 격인 “바이트 알히크마”의 마이모나디스(1135-1204) 같은 유태인 학자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 과학, 신학 서적들이 아랍어로 번역됐고 이는 나중에 라틴어로 재번역되어 유럽의 르네상스를 가능케 한 거대한 지식의 “컨베이어벨트” 역할을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스페인 실지 회복, 리콩퀘스타스페인의 기독교세력은 8세기 초 서북부 구석 아스투리아스 중심으로 미약한 세력을 유지하다가 844년 갈리시아 지역에 성 제임스(산티아고)가 기사복장을 하고 현신하여 그 후부터 이교도 축출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게 된다. 갈리시아에 성(聖)제임스가 나타난 지역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명명되고 성 제임스는 “산티아고 마타모로스”(무어족 킬러 성 제임스)라는 별명까지 붙게 된다. 지금도 카미노산티아고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는 가톨릭 신자들의 중요한 순례지로 알려져 있다.스페인 기독교 세력이 1492년 무슬림들을 완전히 몰아낸 이후,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디난드 2세는 무슬림, 유태인 등 이교도들에 대해 가혹한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후 스페인은 종교재판의 중심지가 될 정도로 기독교 근본주의 이념에 충실해서 과거 알 안달루스 시대의 종교적 관용의 분위기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리콩퀘스타 완결이 있은 지 100년도 안 되어서 스페인의 기독교 왕들은 이교도들에게 개종, 추방, 죽음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개종을 선택한 무슬림, 유태인들은 각각 모리스코, 마라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의심을 당하고 종교재판의 가장 만만한 희생자가 됐다. 한편 스페인을 떠난 무슬림들은 일부는 이슬람권으로 돌아갔고 또 일부 유태인들은 당시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다른 종교 신봉자들에게 관대했던 네덜란드 등지로 이주해야 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하던 이교도들을 다 잃게 되고 이로 인해 농업생산성이나 제조업 수준면에서 엄청난 퇴보를 겪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 스페인 통치자들이 왜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을까? 이는 어떻게 보면 스페인이 문명 충돌의 최전선에 서서 싸워야 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관용을 베풀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시 스페인 가톨릭 통치자들의 심정은, 전방에서 근무하는 군인이 휴가를 나와서 "우리는 겨울철 혹한에 전선을 지키느라 생고생하며 끊임없는 긴장 속에 시달리는데 너희는 후방에서 이렇게 늘어지게 편히 살고 있느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심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이들의 입장에는 알 안달루스와 한참 떨어진 독일같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기독교 종교개혁 움직임은 사치스런 투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타 종교가 용인되던 이슬람 스페인의 수도, 코르도바그러면 오늘날에 와서 알 안달루스의 역사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지난 2009년 뉴욕시 모스크의 이맘파이잘압둘라우프는 9.11 테러사건 당시 무너져버린 세계무역센터 부근에 13층 건물의 코르도바 하우스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었다. 이미 위의 알 안달루스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코르도바라는 이름은 종교적 관용(또는 “Convivencia”)을 상징하는 이슬람 스페인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이었다. 이 건물에는 모스크에 더해서 박물관, 종교간 대화의 장 등을 마련하여 종교화합을 도모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9.11 희생자 가족들을 생각하면 이는 다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악의적인 계획이라고 반대하고 일어났다. 결국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2011년 9월에 이 건물이 완공되고 개장했으나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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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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