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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정인택의 성남읽기 기사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20
    탄리는 왜 탄동이 되지 못했을까? ②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1973년 성남출장소가 시로 승격됨에 따라 새롭게 동을 만들면서 붙인 이름이다. 당시 시정자문회의에서 ‘근심 걱정이 없는 태평한 지역을 만들자’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위 글은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서 인용한 태평동(太平동)의 지명유래입니다. 또 신흥동(新興洞)의 지명유래에는 ‘새롭게 부흥하자’ 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둘 다 좋은 취지를 담아 지은 이름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구로 탄리가 탄동이 되지 못한 사유를 설명해 줄 수는 없습니다. 새로 지은 이름에 담긴 소망이 아무리 간절한 것일지라도 성남에서 탄천이 지닌 상징성을 대신할 도리는 없기 때문. 필경 다른 사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필자가 짐작하는 첫 번째 사유는 원주민의 부재입니다.  1968년 서울시에서 광주대단지 예정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는데, 탄리는 지역 전체가 포함됐습니다. 이후 탄리는 집도, 나무도 풀 한 포기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모두를 불도저가 밀어 버렸던 것. 원주민이 떠난 자리를 서울시에서 몰려온 이주민들이 채웠습니다.  두 번째 사유는 광주대단지 소요 사태의 후유증입니다.정확한 날짜는 1971년 8월 10일. 이때 이주민의 절반 정도가 탄리에 몰려 살았습니다. 또 당시 불에 그을린 성남출장소 청사가 탄리에 있었습니다. 이후 출장소 청사는 위치를 고수한 채 시 청사로 승격했던 바, 필자는 태평동 지명을 두고 이런 추측을 합니다. ‘그때 성남시 공무원들과 관에 순응했던 시정자문위원들이 무사 태평하기를 기원했던 대상은 시 청사였을 것이다.’ 구전민요 중에 <석탄가>가 있습니다. <석탄가> 노랫말에 담긴 것은 민중의 울분.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펄펄 나고요 이내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안 나네 ……. 초대 성남시장으로 내정된 이는 좌불안석이었을 것입니다. 서울 바로 밑에 화약고나 다름없는 도시가 생겼으니 만나는 상관마다 주지시켰지 않겠습니까. 조용! 조용! 조용!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남시의 지명유래가 ‘남한산성 남쪽’이 되었고, 모란동이어야 할 곳이 성남동이 되었으며, 탄리는 탄동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제대로 고증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으며, 불길하다 싶은 지명은 이런저런 명분을 대고 바꾸고 말았던 것입니다.필자는 이것이 성남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그 생생한 역사를 수집하여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수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호로 연재는 그칩니다. 장편소설 집필에 몰두하기 위함인데, 그 일이 끝나면 ‘성남 인물전’으로 틀을 새롭게 짤까 합니다. 그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아쉬운 마음을 필자가 탄천을 소재로 지은 시 한 편으로 달래고자 합니다.                                      숯~내  숯내~   걷다가 속으로    숯~내   ㅊ받침을 길게 늘여가며 속으로   수웇~내  라고 부르면   숯은 참숯  갈참나무이거나 졸참나무   향내가  그 알싸한 내음이 스미는 듯  스며드는 듯싶어라 살갗 촘촘히       걷다가 속으로    숯내~  ㅊ받침이 ㄴ이 되도록 속으로   순내~  라고 부르면   순이가 “녜!” 하는 소리  막내딸 순이가 양 손바닥을 펼쳐 흔들며 “녜!” 하는 소리  다섯 살배기이거나 이제 갓 여섯 먹어   거기서 더는 크지 않는 순이  순이가 방실방실 웃으며 “녜!”  냅다 뛰어와 안기며 순이가 “녜!” 하는 소리  들리는 듯싶어라   탄천은 도시가 비탄에 젖어 흘리는 눈물   하지만 속으로 숯~내  숯내~  라고 부르는 찰나 마음에 하늘빛은 화안하게 개어   그렇게 한세상 쉬엄쉬엄 천천히 걷고 싶어라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12-24
  • 탄리는 왜 탄동이 되지 못했을까? ①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19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아래에 두 기록은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두 기록에 의거하여 성남시청에 묻겠습니다. 현재 중앙동 지역은 1973년 7월 이전 어디에 속했습니까? 단대리입니까, 탄리입니까? * 과거 단대리는 현재의 단대동, 금광동, 중앙동, 은행동 전역과 신흥동 및 성남동 일부를 포합하였다. -단대동의 ‘형성 및 변천’에서.* 1973년 7월 성남시로 승격됨에 따라 탄리 지역을 성남동, 신흥동, 태평동, 중앙동으로 분할할 때 분리 독립하였다. -중앙동의 ‘형성 및 변천’에서. 필자가 탐문한 결과는 단대동의 기록이 옳았습니다. 나아가 중앙동의 기록에서는 성남동도 탄리에 속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 역시 오류입니다. 성남동은 하대원리와 단대리의 일부를 합쳐 새로 만든 동입니다.<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가장 큰 문제는 ‘양립할 수 없는 내용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필자는 지난 호 인터뷰에서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을 방도를 제시했습니다. 그 방안은 수정된 원고 초안을 인터넷에 올려 공개적이면서도 집단적인 토론을 통해 최종안을 확정해 나가는 것.   탄리의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그 터가 어디였는지를 확정해야 할 것입니다. 필자가 살핀 결과는 이렇습니다. 현재 태평동은 전 지역이, 신흥동도 대부분의 지역이 탄리에 속했습니다. 다만 신흥동에서 단대동과 인접한 곳은 단대리였습니다. 한데 1973년 탄리는 홀로 유독 차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왕따!성남시가 발족할 당시 인구 증가로 분할된 행정구역은 탄리, 단대리, 하대원리 등 세 군데였습니다. 탄리는 태평동과 신흥동으로, 단대리는 단대동과 중앙동으로, 하대원리는 하대원동과 성남동으로 분할됐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탄동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남시가 발족하면서 리(里) 단위 행정구역은 모두 동(洞) 단위 행정구역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지명 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분당구의 예를 들더라도 야탑리는 야탑동으로, 서현리는 서현동으로, 율리는 율동으로, 하산운리는 하산운동으로 ……. 이렇듯 지명은 그대로인 채 리가 동으로 대체됐을 따름이었습니다.  오직 탄리뿐이었습니다. 탄리에 탄만 지명으로서의 공식적인 지위를 박탈당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주민들이 그것을 모른 체 했을까요? 필자는 아니라고 봅니다. 주민들은 이런 현수막을 길거리에 내걸었을지도 모릅니다. ‘탄리(炭里)가 탄천(炭川)의 모태였던 것을 성남시청은 자각하라!’  <디지털성남문화대전>은 삼천갑자동방삭의 설화를 탄천의 지명유래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필자도 그 내용을 꽁트 형식으로 써서 발표한 바 있었습니다. 허나 지명유래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승사자가 숯막에 숨어들었을 때 하천의 이름은 이미 숯내였다는 식이었습니다. 전국에 산재했던 모든 숯내에 동방삭 설화가 전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는 또 다른 유래가 실려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인물인 남여이의 호 탄수(炭搜)에서 탄리와 탄천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 하지만 <태종실록>에 실린 아래 기록은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명백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근처 경기도에서 군사훈련을 참관하였다. 대간에서 호종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저녁에 광주(廣州) 탄천(炭川)에 머물렀다. -태종 7년 -1407년- 10월 12일.   탄천에 관해서는 조선시대 군사훈련과 관련된 유래가 전합니다. 대규모 열병식을 했는데, 그때 조리에 쓰인 숯의 잔해가 상당해 탄천으로 불렸다는 것. 한데 위 기록을 보면 태종은 군사훈련을 탄천에서 참관했던 것이 아닙니다. 다른 데서 보고 밤을 탄천 어귀에서 보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태종 7년이면 조선이 건국되고 15년밖에 안된 시기입니다. 또 고려 말에 이미 고위관리였다가 조선 건국 후에도 생존했던 이지직의 호가 탄천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 군사훈련에서 탄천의 지명이 나왔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다른 의문이 있습니다. 탄천과 탄리, 지명의 원조는 어느 쪽일까요? 보통은 마을 이름이 먼저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확인 불가, 하지만 탄리의 지명이 상실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면 주민들이 어렵게 생각할 까닭이 없습니다. 탄리가 탄천의 모태라면서 ‘지명 사수 운동’을 벌이는 것입니다.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가까운 수원시가 지명 시비로 시끄럽습니다. 내막은 이렇습니다. 수원시 장안구 광교산에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자연부락 광교마을이 있습니다. 마을은 위 아래로 구분돼 현재 법정동은 상광교동, 하광교동입니다. 주민은 총 600명 정도. 인구가 적다보니 행정업무는 이웃 연무동의 동사무소를 이용합니다. 따라서 행정동은 연무동이지요.   수원시청에서 영통구에 광교신도시를 개발했습니다. 주민들이 입주하자 행정동을 신설, 명칭을 광교동으로 정했습니다. 그러자 광교마을 주민들이 지명의 고유성을 침해했다며 시위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항의합니다.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탄천탄리’의 관계는 ‘광교산광교마을’과 동일합니다. 아니 보다 더 끈끈했을 것입니다. 농경사회에서 하천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그렇습니다. 한데 1973년 탄리가 탄동이 되지 못하였을 때 주민들은 ‘그러려니’ 했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어찌 그리도 무심할 수 있었을까요? 다음 주로 이어집니다.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12-17
  • ‘지명유래’는 지역공동체 뿌리 찾기의 출발점!
    아이디위클리는 지난 8월부터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연재 칼럼을 진행했다.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큰 물줄기와 함께해 온 성남. 이를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그 향토사적 가치를 찾고 지역 인식의 폭을 넓히기 위한 시도였다. 이번 주로 18회째 연재 중인 정인택 작가를 만나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그가 찾고 있는 성남의 참 의미는 무엇인지 들어봤다. 인터뷰 정권수 취재팀장 사진 이주현 포토그래퍼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12-14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18
    성남시에 모란동이 없는 내력 ②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광주대단지는 이주민들에게는 고통을, 토박이들에게는 충격을 안겼습니다. 달랑 천막을 내주고 나중에 집을 짓든지 말든지는 알아서 하라니 이주민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겠지요. 한데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다 보니 땅값이 뛰었습니다. 브로커들이 농간을 부린 결과였는데, 자고 나면 부르는 값이 다를 정도였습니다. 토박이들로선 기가 막혔겠지요. 자기들이 땅의 주인이었을 때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으니까요.모란개척단 단원들도 허탈했습니다. 단대천을 사이에 두고 그들이 개간한 땅은 시세 차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비교할 수도 있었습니다. 광주대단지는 금싸라기, 자기네 땅은 개털.  김창숙이 단안을 내렸습니다. 광주대단지 바로 밑에 또 다른 단지를 개척하자고. 하지만 지명 모란은 그대로였습니다. 모란마을을 모란단지로 표현을 달리했을 뿐. 모란개척단은 농민단체에서 기업으로 변신했습니다. 주식회사 모란개척단. 주식회사 모란개척단에서 하는 일은 부동산 분양사업이었습니다. 모란단지에 입주할 희망자를 모집, 그들에게 택지를 분양해 인구 250만을 수용할 거대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서울에 사무실을 차렸고요.시급한 과제는 부지 확보. 김창숙은 현재 성남동, 하대원동, 여수동 일대 지주들을 설득했습니다. 분양이 시작되면 모란단지도 광주대단지처럼 금싸라기가 될 터이니 귀하 소유의 땅을 모란단지에 편입하시라.대부분 협조적이었습니다. 손해 볼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모란단지에 편입됐다고 해서 땅의 소유권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부지를 매입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모란단지 분양 광고를 신문지상에 떠억하니 실었으니. 김창숙이 군사정권 핵심부와 선을 대고 있었기에 착수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우체국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란시장 근처에 우체국이 새로 생겼는데, 이름이 모란우체국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모란은 공식 지명이 아니었습니다. 모란시장 일대에 공식 지명은 하대원리. 따라서 하대원우체국이라야 했습니다. 지금 현재도 우체국은 공식지명 이외는 채택하지 않습니다.모란우체국은 정상적인 경로로 개설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체신부장관이 김창숙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개설을 지시했고, 초대 우체국장으로 발령을 받은 사람은 체신부장관의 친동생이었습니다. 한데 왜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별 힘도 못 쓰는 우체국을? 모란우체국은 모란단지 프로젝트가 정부에서 공식으로 승인했다는 증거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분양 신청을 하라는 것입니다.김창숙의 배포는 한껏 커졌습니다. 모란단지 기공식을 열면서 상공에 군용 헬리콥터를 띄우기까지. 행사는 성대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평생 가야 한 번 볼까말까한 구경거리였습니다. 당일 성남출장소 공무원들이 행사 진행 요원으로 동원됐습니다. 그것이 1973년 성남시가 발족할 때 ‘모란동’이 되지 못하고 ‘성남동’이 된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성남시청 공무원들이 ‘김창숙 측근’으로 몰릴까 싶어 지명 모란을 기피했던 것입니다. 1971년 5월 김창숙은 ‘모란단지사기분양사건’의 주범으로 구속됐습니다. 사업이 흘러가는 형태를 볼작시면 필경 파탄으로 귀결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의도적인 사기극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기업 경영에 경험이 일천했고, 사업규모에 비해 손에 쥔 자금이 턱없이 부족하다보니 나중에 감당을 못하게 되고 만 일.그런데 김창숙과 모란개척단 단원들은,“사람만 끌어 모으면 돈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돼.”라고 여겼을 듯합니다. 광주대단지가 그랬거든요. 시행 주체였던 서울시에서 했던 일이라고는, 부지를 매입한 뒤 불도저로 깡그리 밀어붙인 것이 전부. 그리고는 서울시 철거민들을 트럭에 태워 이주시켰습니다. 그랬더니 땅값이 뛰기 시작했고요.허나 막상 사업을 시작하고 보니 사람이 그냥 모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홍보에만 막대한 비용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여유 자금으로 모란단지 예정지에 땅을 매입하겠습니까. 분양대금은 들어오는 족족 빠져나가는 판국에. 정부는 피해자의 숫자가 엄청날까 걱정돼 서둘러 검찰에 수사를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피해자가 상당했습니다. 성남출장소는 그들을 달래기에 안간힘을 써 현재 수정구 산성동 일대에 입주할 부지를 마련했습니다. 1971년 8월 광주대단지 이주민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름 하여 광주대단지 소요사태. 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에 성남출장소 건물이 불에 그을렸습니다. 요행 당일 비가 내렸습니다. 덕분에 내부가 그을린 정도로 그쳤는데, 공무원들의 가슴에 상흔은 깊었습니다. 73년 성남시가 발족했습니다. 하지만 공무원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습니다. 또 무슨 일이 터지지 않을까, 불안 초조 …….그 불안감으로 하여 지명 모란은 공식적인 지위를 얻지 못했습니다. 지역에서 가장 먼저 개척된 것을 기념한다는 괴상한 명분으로 성남동이 되었던 것.필자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성남동은 모란동으로 개명하는 것이 옳다!   이번 주는 여기까지. 다음에는 탄리가 탄동이 되지 못한 내력을 살피겠습니다.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12-13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17
    성남시에 모란동이 없는 내력 1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편집자주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12-05
  • 군사정권이 불러일으킨 거대한 착각 ②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16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편집자주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11-30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15
    군사정권이 불러일으킨 거대한 착각 ①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편집자주 본 연재 3회에서 필자는 지명유래를 정설, 속설, 허구로 나눌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또 여러 설이 분분할 때는 ‘정설부터 확립하는 수순’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서 추출할 수 있는 정설은 아래 두 가지입니다. 첫째, 조선시대에 이미 城南은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둘째, 공식적인 지명으로는 1946년 성남출장소가 처음이다. 이후 64년과 68년의 성남출장소, 그리고 73년의 성남시는 이전의 지명을 계승한 것이다.  이외의 기록은 모두 추측입니다. 필자가 제기한 한양도성 설도 지금 현재 수준으로서는 추측의 범주를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속설에 해당될 것인데, 관건은 신빙성입니다. 어떤 속설이 더 믿을 만한가? 정설도, 속설도, 허구도 모두 소중합니다. 향토를 사랑하는 주민들의 마음이 깃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또 거기에는 시대상이 반영돼 있기도 합니다.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상징성이 서울시 성북구와 성동구의 지명을 낳았습니다. 성남시 지명의 모태도 한양도성이라고 필자는 앞에서 누누이 얘기했습니다. 나아가 필자는 남한산성 설도 시대의 산물이라고 여깁니다.현재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기록된 지명유래는 1973년 이후에 성립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 출장소는 임시 행정구역이라 지명의 내력을 고증하여 문헌으로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1973년, 그 무렵에 이르면 남한산성은 아주 유명했습니다. 남한산은 몰라도 남한산성은 다들 알았습니다. 남한산성 설은 그러했던 시대상의 반영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1961년 5월 16일 일부 정치군인들이 병력을 이끌고 와 수도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그로써 모든 서울시민들이 총알받이 신세로 몰렸습니다. 이는 정치군인들의 작전에 포함된 내용이었습니다. 군인정신에 투철한 군인들이 지휘체계를 바로잡겠다고 진압하려든다면, 어디 한번 붙어 보자는 것입니다. 시가전 중에 무고한 서울시민들이 희생될 것은 자명한 일. 1979년 12월 12일의 신군부 쿠데타에서 특전사와 수방사의 지휘관이 진압하려 하자 하나회 소속 대령들이 하극상을 자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출동했다고 치더라도 이미 서울시내에 진입한 상황에서 두 지휘관은 실탄 발사 명령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이렇게 쿠데타 성공의 이면에는 서울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재수 없으면 총 맞아 죽는 서울시민들이 ……. 정치군인들이 내건 명분은 안보였습니다. 안보 없으면 모든 게 없다.전방의 병력을 빼돌리고 안보라니, 일단 그것이 궤변이었습니다. 한데 남한산성이 안보에 교묘하게 이용되었습니다. 정치군인들에 의하면, 병자호란 패배에 주된 요인은 국론의 분열이었습니다. 당쟁이 나라를 망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한산성에서의 치욕을 재현하지 않으려면, 정부정책 아래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부정책과 다른 목소리는 일절 내지 마라.그렇다면 병자호란 직전에 당쟁은 극심했던가? 필자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전혀 아니었음. 특히 대외정책에 관해서는 한 목소리나 다름없었음. 허나 그것은 여기서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본 글에 핵심은 남한산성. 정치군인들은 남한산성을 안보 교육장으로 삼았습니다. 대학생들의 남한산성 순례는 정규 수업이 됐습니다. ROTC 학생들의 방학 중 훈련 장소도 남한산성이었습니다. 국군 체육부대를 비롯한 군부대가 인근에 들어섰습니다. 결정적인 시설이 부산에서 옮겨 왔습니다. 1962년 수정구 창곡동으로 육군형무소가. 군은 남한산성을 공식 명칭으로 지정하지 않았습니다. 또 남한산성 내부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데 필자가 현역으로 복무할 때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돼 형을 마친 이들의 사연이 담긴 책을 읽은 적 있습니다. 제목은 <남한산성에서 부는 바람>. 제목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은 육군형무소에 공식 명칭이나 진배없다는 것을.물론 처음부터 남한산성이라고 호칭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남한산성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자, 면회 가려는 가족들에게 남한산성을 안내했던 것이 발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앞에서 표현했던 대로 남한산은 몰라도 남한산성은 알아차렸거든요. 남한산성이 육군형무소의 별칭으로 통하게 되자 현역 군인들에게 그 이름은 공포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혹독한 얼차려 중에 ‘남한산성에 가 봐라. 거기서는 찬물만 끼얹지 않으면 거꾸로 매달려서도 코를 골면서 잔다.’ 라는 말을 듣기는 예사였고, 한번 끌려갔다 하면 살아서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을 이렇게 비유하기도 했습니다.‘더디더라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하지만 남한산성 시계는 멈춘 시계.’ 그때에 민간인인들 별수 있었겠습니까. 군사정권의 정책에 시큰둥한 목소리에는 여지없이 공권력이 따라붙었는데, 연행된 모처가 어디인 줄도 몰라서 가족들이 발을 동동 굴리던 시대. 모처의 요원들은 극단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사람을 짐승 취급해도 무방한 자유까지.한데 그 과거사를 시대 상황의 논리로 얼렁뚱땅 넘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인간의 존엄성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심히 두렵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국가권력의 과오 중에 세월이 흘러도 용납해서는 아니 될 일이 무엇인지?더 근본적으로, 국가가 왜 있는지? 이번 주는 여기까지. 하던 이야기는 다음 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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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11-23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14
    남한산성이 아니라는 네 가지 근거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편집자주 위 지도에 의하면 남한산성 남쪽은 현재 광주시입니다. 따라서 남한산성이 지명 형성에 근원으로 작용했다면 ‘성남마을, 성나미마을, 성내미마을’ 등은 광주시에 흩어져 있어야 합니다. 즉 城南이 대표지명이어야 할 곳은 현재 광주시입니다.1946년에 성남출장소는 광주군청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지명을 두고 지역 간에 갈등이 생겼다면 광주군청이 중재에 나섰겠지요. 그리고 중재안도 아주 쉽게 나옵니다.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서쪽은 城西, 남쪽은 城南. 이 중재안을 누가 거부한단 말입니까?그런데 분규 자체가 없었습니다. 1973년 성남시가 광주군에서 분리 독립할 때에도 지명에 관한 시비는 전혀 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지명 형성에 근원이 남한산성이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근거입니다. 두 번째 근거는 교통.  광주시도 성남시처럼 서울시와 경계선을 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로 곧장 가기는 어렵습니다. 까닭은 해발 480미터 남한산이 서울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 하여 서울시에 용무가 있는 광주시민들은 성남시를 거쳐 갑니다.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곧장 갈 수 없으므로 광주시에서는 城南이란 지명 인식이 성립하기 힘듭니다. 성남시 일대는 다릅니다. 성남시는 전체적으로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길도 평탄하여 여기도 저기도 城南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근거는 여행객들의 지명 인식입니다. 대과에 응시하려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향하는 경상도 유생들의 길을 짚어 봅시다. 문경새재 이후에 행로는 충주, 음성, 장호원, 이천, 광주 ……. 광주시에서 서울로 가려면 성남시를 거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선시대 광주군 낙생면-현 성남시 분당구-에는 관에서 운영하는 역원이 있었습니다. 유생들의 상당수가 낙생 역원을 찾았을 것입니다. 역원 인근의 객주(客酒)도 대목을 맞았겠지요. 속된 말로 눈 빠지게 기다렸던 ‘대박 시즌’ 아니겠습니까.낙생면 다음에 길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먼저 남대문 코스. 이 코스는 청계산을 우회해 과천으로 빠집니다. 다음은 동대문 코스. 이 코스는 탄천의 흐름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도중에 양재천을 합류해 한강에 닿는 것이지요.둘 중 동대문 코스에 집중해 봅시다. 오늘날 분당선 전철 노선을 따라 유생들이 숙식을 의탁하던 민박집들이 늘어서 있었을 것입니다. 한양 입성이 하루면 가능하니 일찍 도착한 유생들은 서두를 까닭이 없을 터, 경비가 넉넉지 않으면 한양에서의 체류는 짧을수록 좋습니다. 두 눈 멀쩡히 뜨고도 코 베이는 데가 한양이니까요.만약 경상도 안동에 유생들이 술자리에서 ‘한양도성 남쪽에서 며칠 머문 집’의 인심을 회고했다면 그 집에 소재지는 어디일까요? 현재 성남시와 서울시 강남구입니다. 네 번째, 한양 가까이에 한양도성과 경쟁할 성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고려 말과 조선 초를 살았던 권근의 한시에 <春日城南卽事(춘일성남즉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봄날 城南에서 있었던 일. 하지만 그 城을 한양도성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성곽이 완성됐다고 해서 곧장 城南이란 지명 인식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두 차례 왕자의 난으로 개성으로 환도한 일도 있어 그렇습니다. 또 시의 내용도 지극히 낭만적인 것으로 보아 권근이 젊은 시절 썼던 것으로 추측됩니다.<春日城南卽事>에 城은 개성도성입니다. 따라서 城南은 경기도 개풍군에 어디쯤이었겠지요. 개풍군은 소설가 박완서의 고향입니다. 권근과 박완서 사이에는 6백년 세월의 간극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에게 6백년은 찰나일 수도 있습니다. 권근의 <春日城南卽事>에 표현된 杏花(행화), 살구꽃이 박완서의 고향 얘기가 담긴 <그 여자네 집>에서 살아 있었으니 말입니다.  우리 마을엔 꽈리뿐 아니라 살구나무도 흔했다. 살구나무가 없는 집이 없었다. 여북해야 마을 이름도 행촌리(杏村里)였겠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살구나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개성도 나옵니다. 박완서는 어릴 적 개성에 갔다가 도시가 주는 묘한 매력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한데 城南은 나오지 않습니다. 개풍군에 城南이라는 지명을 가진 행정구역은 없습니다.왕조가 지속됐던 기간은 엇비슷합니다. 고려도 조선도 줄잡아 5백년. 따라서 개성도성을 중심으로 해서도 성동 성서 성남 성북이라는 지명 인식은 형성되었겠지요. 문제는 개성과 한양이 너무 가깝다는 데 있었습니다. 지명이 긴장을 유발시킵니다. 한양도성을 따르는 城北이 있는데, 거기서 얼마 안 가 개성도성을 추종하는 城南이 있는 상황은.절대왕정 시대에 도읍지는 가히 성역입니다. 그 가까이에 중심지 구실을 하는 城은 절대금기. 허나 자연은 무심합니다. 살구꽃이 피고 지고, 또 피고 지고 ……. 이렇게 아무리 따져 봐도 城南에 城은 한양도성입니다. 이것이 최종 결론입니다. 이어질 내용은 이렇습니다. 군사정권이 불러일으킨 거대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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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11-15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13
    귀거래 노래에 홍진(紅塵) 이문형의 <압구정기>에서 城南이 나오는 부분은 ‘城南咫尺隔紅塵(성남지척격홍진)’입니다. 이 대목을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성남(城南) 지척 사이에 홍진(紅塵)이 막혔구나’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내용은 어려워 ’홍진은 번역 안 되나’라는 생각도 들 법합니다.붉을 홍(紅), 먼지 진(塵), 홍진은 붉은 먼지입니다. 통상 비유적으로 쓰였습니다. 세속적 욕망, 혼란스러운 세상, 어지럽기 그지없는 한양조정 등. 그런데 귀거래 노래에서는 한양조정으로 해석하면 간명합니다. 그 시끄러운 곳에서 보냈던 세월을 탄식하는 것이지요.아래는 정극인의 귀거래 노래 <상춘곡>에 맨 앞부분입니다. 
    • 사람들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11-09
  • 정인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남 12
    한명회의 압구정과 황희의 반구정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시작한 보잘 것 없던 지역이 현재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개발로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현재 성남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의 향토사적 가치와 정확한 해석이 뒷받침됐다고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소설가 정인택 씨와 함께 성남을 역사적, 지명적으로 재조명해봄으로써 성남의 과거와 미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한양도성의 북쪽 임진강 어귀에는 반구정(伴鷗亭), 남쪽 한강변에는 압구정(狎鷗亭)이 있었습니다. 伴鷗는 갈매기와 반려한다, 狎鷗는 격식을 가리지 않고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이니, 유유자적한 삶을 상징하는 정자의 이름으로는 썩 잘 어울린다 하겠습니다.귀거래(歸去來)도 정자와 썩 잘 어울리는 낱말입니다. 관직은 종신직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짐을 꾸려야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지요. 그렇게 모든 것을 훌훌 털고 귀향하는 은퇴 관리의 귀향을 일러 귀거래. 정자는 귀거래 이후의 삶을 유유자적하며 보내는 곳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귀거래와 관련하여 두고두고 얘기되는 정자가 둘 있습니다. 반구정과 압구정. 반구정에서 여생을 보낸 이는 황희입니다. 기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2년 남짓. 세종이 한사코 놓아주지 않아 황희는 87세가 되어서야 관직에서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압구정을 지을 무렵 한명회의 나이는 40대 중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압구정기>를 지은 인물 중에 안지(安止)가 세조 10년(1264년)에 졸한 것으로 보아 그러합니다. 귀거래하기에는 이른 시기. 하여 이문형은 대업을 이룬 연후에 갈매기를 벗하라는 덕담을 남겼는데, 말년에 한명회는 쫓겨났습니다. 귀거래마저 불가한 처지로 몰린 것. 그럼에도 <압구정기>는 계속 나왔습니다. 이런 내용으로요. 주인은 어디 가고 갈매기 혼자 노니는가 ……. 현재 반구정은 경기도 지정문화재입니다. 그런데 옛 건물이 아닙니다. 6.25 때 전소된 것을 복구한 것입니다. 또 그런데 6.25 때 전소된 것도 황희가 생존했던 시기의 것은 아닙니다. 황희의 손때가 묻은 반구정은 오래 가지 못했답니다. 양질의 목재를 쓰지 않았던 결과였겠지요. 황희의 넉넉한 인품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립습니다. 사라진 반구정이 새로 지어지는 내력, 그리고 문화재로 지정된 바탕이 바로 그것입니다. 황희를 추념하고자 함.  압구정은 터만 남아 있습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터를 알리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한데 언제 없어졌는지는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단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벌어진 당일까지는 건재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래는 고종 임금이 보고 받은 갑신정변의 수사 결과입니다.  죄인 윤경순(尹景純)의 결안(結案)에, 압구정(狎鷗亭)에 모여 사냥하면서 음모를 꾸미고 몰래 우정국(郵征局)에 가서 흉악하고 간사한 짓을 저질러 ……. -<고종실록> 고종 22년 12월 23일 자 기사 중에서. 여기에 왜 압구정이 등장하는가? 압구정에 마지막 소유자가 박영효였습니다. 위 기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박영효가 압구정을 갑신정변에 근거지로 활용하였음을. 갑신정변은 일본군의 호위를 받음으로써, ‘저주 받은 혁명’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당시 민중들은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을 일러 ‘갑신5적’으로 규탄했습니다. 김옥균은 안동 김씨 족보에서 이름자가 지워졌습니다. 상하이에서 암살당한 뒤 운종가에 내걸린 김옥균의 목에 민초들은 돌을 던졌습니다. 홍영식은 일본으로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을 모시겠다고 남았는데, 고종이 보는 앞에서 피살됐습니다. 이후 홍영식의 아버지와 처는 자결. 서재필의 처도 주위의 시선에 견디다 못해 목을 맸습니다. 그 아래서 칭얼대던 젖먹이 아이는 굶주림을 못 이겨 …….  그렇듯 갑신정변에 대한 민심이 사나울 때, 압구정은 인근 주민들이 몰려가 무너뜨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필자는 이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갑신정변과 반대로 계유정변은 성공한 쿠데타입니다. 한명회는 계유정변으로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해 압구정을 지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압구정은 팔자가 참 드센 정자였습니다. 한명회 당대에 ‘주인이 스스로 판 무덤’이라는 저주서린 평가를 받았으니까요. 무덤에 덜컥 발을 내딛고서는, 한명회가 용서를 구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걸로 끝. 영사(領事)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대간의 말이 옳습니다. 신(臣)이 압구정(狎鷗亭)을 지은 것을 깊이 뉘우칩니다.” -<성종실록>, 성종 11년 6월 7일 자 기사 중에서. 명나라 외교사절이 압구정을 구경하려 하자, 한명회가 용봉차일(龍鳳遮日)-용과 봉황을 수놓은 임금 전용 햇볕가리개-을 내달라고 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신하로서 절대 넘어서는 아니 될 선을 넘고 말았던 것. 탄핵이 빗발쳤고, 이후 추락은 끝도 없었습니다. 투옥, 유배, 쓸쓸한 죽음, 부관참시, 후세들의 조롱 …….박영효도 인생 후반부에는 오욕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냈습니다. 친일파로 이완용을 방불케 하는 짓거리를 자행하였던 것입니다. 반구정과 비교하자면, 압구정은 주인을 잘못 만난 듯합니다. 정자의 운명도 주인의 평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일까요? 다음 주에는 이문형의 <압구정기>에 표현된 城南에 城이 한양도성인 것을 밝히겠습니다. 그 이전에 귀거래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해 이번 회 내용을 채웠습니다. 현대시에도 귀거래의 미덕을 노래한 작품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꽃이 지는 자연의 섭리를 귀거래에 비유한 이형기의 <낙화(落花)>. <낙화> 1연을 여운으로 남기려 합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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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인택의 성남읽기
    201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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